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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수요일

올해 우리학교 졸업작품전을 다녀온 친한 사람이, 예전 전시에 비해서 의아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고 했다. 또 나도 인터넷에서 디지털미디어 전시를 보고 여러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조차도 그렇게 재능이 있는 사람도 아니라 누군가를 폄하할 처지도 아니고, 그들의 속사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잘 모르니 뭐라 주장할 순 없겠지만, 내가 기대했었던 모습들이 나와 몇학번 차이 안나는 선배들과, 나의 동기들에게서 보이지 않았었다. 정시입시가 실기시험으로 바뀌고 난 이후에 입학한 학번들인데다가 2009~2010학번은 입시경쟁률도 높았던 학번이었고. 순수파트 경쟁률도 높았던 학번이었는데 정작 화면 힘은 약해진것 같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입시학원에서 일을 하는 학과 동기를 만났는데 입학전형에서 비실기전형 비율도 높아지고 세부전공이 꼬여버려서 우리과가 ‘망했다’ 고 한다. 난 물론 순수파트 전시를 직접 못봤으니. 디지털미디어 전공은 우리때즈음부터가 거의 시작이었어서 정착이 안된 부분이 있었을테니, 여러가지로 뒤숭숭한 일도 겹쳤었으니 그랬을거라고 생각하고 싶으면서도 속상한 부분이 없지않아 있다.

또 한편으론 많은 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놓고 있다가, 다시 잡으려니 자신이 없기도 하다. 2010년 이후론 잠깐 영어시험준비한다고 문제 좀 풀어본 일이나 아르바이트 하면서 외국인 손님들을 대할 때 빼곤 영어로 뭔가를 할 일도 딱히 없었고, 암실에 간 적은 2012년에 한 번, 2013년에 한 번. 군대에 있는 동안은 타의에 의해 사진을 거의 못 찍었고, 작년 한 해 동안은 일주일 중 하루 빼곤 쉬는날이 없었으니 – 그리고 그 쉬는 날에도 낮에는 거의 잠을 자거나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 – 카메라를 오랫동안 들고 있을 여유가 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누군가에게 내 카메라를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았다가 다시 빌려주었다. 입시준비한다고 할 때도 그림은 사실 많이 그리질 못했다. 누군가가 변명이라고 핀잔준다면 아니라고 할 자신은 없지만, 깨어있는 시간 내내 힘들었다. 앉아있을 때마다 졸았던 것 같다. 16만원을 내고 갔던 어떤 공연에서도 뒷부분 반절정도는 졸면서 앉아있었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릴 때도 참 많이 졸았다.

내 마음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원래 집중력이 길지 못하단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요즘엔 더 심한 것 같다. 스무살 때 부터 가지고 다니는 어떤 갈색 수첩의 어느 한 부분엔 몇 페이지짜리 리스트가 있다. 해야 할 사소한 일들, 배워야 할 것들, 읽어봐야 할 것들, 가보아야 할 것들, 보고 듣고 맛보아야 할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어디선가로부터 듣게 되는 대로 써두고는 하나씩 하나씩 해보는 리스트인데 한두 달 쯤 전부터 그 공책을 꺼내질 않고 있다. 마음을 다잡고 페이지를 펼쳤다가도 다시 어딘가에 넣어두어버리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일도 어느 순간부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어서 못보는게 아니라 영화를 보는동안 내 안의 무언가가 계속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좋아한 영화든 싫어한 영화든 보고 나면 하루이틀동안 몸이 아팠다.

살아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질투와 동경이 뒤엉킨 감정을 품었다. 처음엔 나에게 자극이었지만 나중엔 나와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인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저께 친한 누군가와 이야기 하던 중 몇명의 이름을 들면서 ‘~는 나와 달리 재능이 많아서 부럽다’고 말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 말에 동의하는 말을 딱히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평소에 느끼던 감정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때문이었는지 그 날 내내 그 대화내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른 누군가의 졸업작품을 가지고 내가 뭐라고 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나 역시 그사람들보다 더 좋은걸 만들어 낼 재능이 없는 것 같아서 힘이 빠졌다.

학교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숨이 막히는 듯 하다.

딱딱한 글 1

어떤 책에서, 예술의 의미적 요소와 미적 요소간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음악을 악보의 맨 마지막 음부터 맨 처음 음 순서로 – 다시말해, 거꾸로 – 연주를 하면 의미적 요소인 멜로디는 소멸되고 미적 요소인 음악적 형식만 남는다고 했다. 동의할 수는 없는 말 이었다. 멜로디를 ‘미’가 아니라고 전제하는 부분부터 편협한 생각이란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글쓴이가 이런 글을 자신의 책에 쓰게된 경위에는, 기존의 의도되었던 순서가 이리저리 뒤섞여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에겐 ‘뒤엉킴’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던 경험이 무의식중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해체주의’ 라는 고상해 보이는 단어가 이미 이 경험들의 대유법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난 해체주의 미학에 관하여 배운 바가 전혀 없으니 내가 바라본게 보편적으로 맞는것일진 모르겠지만, 난 이것을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술에 취한 사람이 두서없는 문장을 이어가면서 자기 속마음을 꺼내듯, 자동기술법으로 쓴 글의 내용순서가 뒤죽박죽이듯, 우리의 이성으로 통제해 적절히 배치된 우리의 언어가 흐트러지고 일그러질 때 그 틈새는 재구축 되어 우리의 내면의 표상이 된다고 믿는다. 길게 이어져 있는 부드러운 흐름이 조각조각 나뉘어져 각각의 조각이 독립적인 형태로 존재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낸다. 시간의 흐름의 한 절편을 도려낸 언어인 ‘사진’에서 ‘푼크툼’ 이라는 – 이 단어의 창제자인 롤랑 바르트 조차도 이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썼지만 끝내 명확하게는 설명해내지 못한 –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면서, 이것을 ‘우리를 찌르는 것’, ‘점’, ‘얼룩’,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 이라고 지칭하는 건 어떤 틀이나 구조에서 깨어져 나온 하나의 조각이 우리가 마음의 우물 속 깊은 곳에 던져놓은 것들을 비추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이 조형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쇼트를 이어붙여서, 이어붙인 두 개의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끌어내는, ‘충돌’과 ‘파편’에 관한 어떤 개념을 만들었을 때, 그것은 그저 카메라워크의 기술적 진보 정도로 밖에 해석될 여지가 없는 것일까.

사실 아주 사소한 경험들에서 시작한 생각이었다. 제한된 글자 갯수로만  글을 쓰는 어느 소셜 서비스. 긴 호흡의 글을 쓸 때면 한두 문장 단위로 글을 나누어서 올려야 한다. 그리고 그걸 읽는 사람은 여러사람들의 한두 문장 짜리 글이 뒤섞인 상태에서, 거꾸로 읽게 된다. 맨 마지막에 쓰인 글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때론 글쓴이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 안엔 때론 나의 말이 있었고 나의 생각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내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각조각난 무수한 문장들 앞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개어내고 있었다는걸 알았다. 좋은 것일지 나쁜 것일지 판단은 서지 않는다. 그저 이것이 나만의 거울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